백두산 종주기
중국 동토의 관문이며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 이기도 한 단동항에
밤새 태평양의 검푸른 파도를 가르며 힘겹게 달려와 도착한 시간은
아침이였다.
그리고 이나라의 첫 인상은 희뿌연 먼지와 매쾌한 냄새을 풍기는
회색의 도시였다.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가이드와 첫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1시간여만에
도착한 곳은 신의주 건너편 이였다.
말로만 듣던 신의주는 강폭 50여m 쯤 되는 한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조그만
강이 였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북한을 바라보고 싶은 한국 관광객들의 심리를 이용한
중국의 상술이 어김없이 반영된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돌아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낡은 배들이 몇척 있기도 하고 강가엔 무심한 주민들이 하릴없이
앉아 있었으며 지나가는 우리 배를 향해 다행이 손을 흔들어 주는 여군 한명을
보기도 했다
한편엔 가끔 tv를 통해서 본적이 있는 신의주 국경을 잇는 철교 였다.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
[신의주 철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이화원이라는 식당인데
10여년을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중국말을 모른단다.
그만큼 우리 한국사람 들이 많이 찿는 곳이 라는걸 반증 함이다.
압록강을 뒤로 두고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 보기 위해 집안(集安)으로 향했다.
버스로 장장 5시간이나 소요 된다니 참으로 먼거리 였다.
도착한 집안의 입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이 국내성 성터에서 왕도를
이루웠다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데 불구하고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겨우 흔적만이 남아 있음이 못내 아쉬웠다
성터를 지나 도착한 곳이 바로 공개토대왕비 였다.
중국정부가 전혀 돌보지 않아 거대한 석물인 광개토대욍의 비문은 이미 바람에
깍이고 비에 씻기어 글을 읽기조차 힘들 지경으로 훼손되어 있었다.
중국에서야 자기들의 부끄러운 역사라고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치드라도 북한
정부에서는 왜 항의나 외교 교섭없이 우리의 이 위대한 역사의 유물들을 방치 했는지
안타깝기가 그지 없었다.
[글씨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광개토왕비]
또한 광개토대왕 무덤 역시 돌보는 이 없어 허물어 지고 있는 걸보니 안타까움은
더했다 그나마 다행 인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 능은 워낙 튼튼하게 축조 한 탓에
외관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내부엔 습기를 방치하고 있었다
아~ 우리 민족의혼 고구려의 역사가 이렇게 허물어 지고 있다니...
[공개토왕릉]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릉-]
안타까움을 간직한채 通化로 이동했다
이도백화로 가기 위한 열차역이 있는 곳이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통화역은 캄캄한 밤이 였건만 불빛조차 없는 한산한 역이였다.
절약을 위해 조명을 켜지 않은듯 한데 그들의 절약정신을 우리는 칭찬을 해 줘야 할지
핀잔을 줘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또한번의 실망은 야간 침대열차 였다
야간 침대 열차라면 편히 잠을 잘수있는 안락한 침대를 기대한 것과는 달리 1실6인의
3층 좁은 침대였다. 이것 또한 여행의 참맛이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지만 일행중
한사람의 심한 코골이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다.
[ 야간 침대열차 3단 ]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7시간이나 달려오면서 첫밤을 보내고 맞이한 새벽의 白河엔-
장뇌삼과 잡다한 물건을 팔기 위해 우리를 마중나온 중국의 장사치들이 아니였다면
마치 우리의 제주도와 분위기가 비슷한 숲이 많은 평온한 도시였다.
한글로 새겨진 간판의 [고려식당]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버스로
1시간만에 장백산 입구의 아늑한 온천탕이 있는 여관에 다달았다.
우선 여장을 맡기고 도착한 곳이 장백산입구였다. 수많은 인파가 뒤셖여 혼잡했다
[장백산 입구]
장백산 번호판이 붙은 샤틀버스로 [천지]로 향하는 입구까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20여분을 올라 가니 거대한 물줄기의 하이얀 포말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장백폭포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압도했다
나를 더욱 흥분 시키는건 아련히 비춰지는 무지개였다
[장백폭포]
다시 천지를 향한 길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수없이 올라야 하는 가파른 계단 길이였다
허지만 천지를 보겠다는 희망에 부푸른 마음으로 발걸음이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오르기를 꼬박 40여분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천지의 장관은 마치 꿈처럼 펼쳐졌다
짙푸른 천지의 물, 구름한점 없는 파아란하늘, 수억년을 그렇게 천지를 수호하며
늠늠히 지켜온 수많은 형태의 바위들, 이름조차 알수없는 온갖 야생초들,
천지의 그 신비함과 황홀감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혀 한동안 멍한 나는 겨우 한마디씩
감탄사를 자아낸다,
[천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여기저기선 연달아 탄성이 나온다
소리를 지르는 이,손을 번쩍 들어 환호하는 이, 서로 부등켜 안고 풀쩍풀쩍 뛰는이,
조용히 눈을 감고 두손모아 기도하는이, 천지를 향해 연신 절을 하는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샤터를 눌러대는 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렇게 청명한 날씨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기도 드렸다. 아마 모두가 하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천지를 맑은 하늘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 했음이 하늘에 닿았는가 보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되어 한없는 아쉬움을 가슴에 간직하고 하산을 해야만 했다.
지금 우리가 본 곳은 북쪽 언덕인 북파이고 다시 서쪽 언덕인 서파를 보기위해서다.
우리가 여장을 푼 [장백산온천별장]에서 중식을 먹고 다시 서파 짚차 트래킹이 시작
되었다
천지를 향해 오르는 길은 비탈길 이지만 견고하게 짜여진 돌길로 교행이 되도록
만들어진 길이 였다.
4명씩 조를 정해 짚차에 승차하여 출발하는 순간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차의 핸들을 이리 꺽고 저리 꺽고, 우린 그 좁은 차안에서 이리저리 쏠리면서 연신
비명을 질렀다.
짚차트래킹의 즐거움을 더해 주려는 훈련된 기사들의 배려인듯 했다.
바짝 올라 붙어 서늘해진 간을 쓸어 내리면서 차에서 내려
200여m 전방을 향해 올라가서 천지를 보는 순간 갑자기 하늘엔 먹구름으로 뒤덮이면서
소낙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혼비백산이 된 우리 일행은 서둘러 하산을 해야만 했다
30m도 못가서 눈과 짖눈개비가 섞여 퍼부어진다. 7월 하순에 눈이라니...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우린 그 비를 다 맞으며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모두들 입술이 새파래 지면서 덜덜 떨기 시작한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뛰어 내려와 온몸에 물을 줄줄 흘리며 짚차에 겨우 올랐팄다.
불과 30여분 만에 급변하는 기후의 변화였다.
[시시각각 기후가 변하는 백두산]
백두산의 심술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별장에 도착하여 온천탕에서 목욕을 한후 노천
탕에서 1시간 동안 수영의 안락함에는 백두산의 포근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미리 주문 해놓았던 天池産 산천어의 회 맛은 두고두고 잊지못할 달콤함이다.
다음날 새벽 3시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깼다
별장에서 싸준 도시락 2개를 배낭에 넣고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종주를 위해
대장정의 길을 시작했다.
다시한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졌다. 아무런 사고 없이 완주 하기를...
하늘을 쳐다보니 대 은하수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마치 내 머리 위에서 바로 쏟아 질듯 했다
온 하늘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많은 별 별 별들
일찌기 이렇게 맑고 깨끗한 별 들을 본적이 있었든가?
[백두산의 일출]
소천지를 지나 04시11분에 맞이한 일출의 장관을 우린 뜨거운 함성으로 맞이했다.
수없이 다닌 지리산이나 한라산에서도 일출을 보지 못 했는데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백두산에서 이렇게 일출을 보다니 정말 감개무량 했다. 난 조용히 가족의 건강을
마음속으로 빌기도 했다. 모두모두 건강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백운봉으로 향해 가는 길에 펼쳐지는 백두산의 그랜드캐년, 백년설, 야생화, 아름다운
곡선의능선과 계곡, 귀가 시리도록 따갑게 불어오는 바람, 아침 햇살을 받고 길게 드리워져 걸어
가는 우리들의 그림자 모두가 한폭의 그림이였다.
[우리 대원들의 걸어 가는 모습의 그림자] [일출때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모습]
드디어 중국령의 최고봉인 백운봉(2,691m)에 도착 하여 천지를 아래로 바라보며서 아침 도시
락을 먹는 색다른 희열은 도저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것이다.
[백운봉에서 바라보는 천지]
다시 백운봉에서 내려가서 청석봉으로 오르는 4시간의 산행에는
수백만평의 완만한 능선에는 노오란 고산 양귀비, 보랏빛매발톱,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
한 비로용담, 바람에 하늘 거리는 구절초, 바위솔, 시로미....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백만 송이의 꽃봉우리 들...
[야생화의 향연]
천국이 이렇게 생겼을까?
야생화들이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천상정원의 향연들을
가슴 벅찬 환희로 오래토록 가슴에 간직하고
또 머리에 각인 시키기 위해 보고보고 또 보고하며
백두산종주의 힘듬 조차 잊은채 도착한곳은 청석봉(2,620m) 이였다.
청석봉에서 다시 발아래 천지를 바라보며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몹시 추웠다.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서둘러 하산을 강행했다.
[청석봉에서 바라 본 천지]
지금까지의 아름다운 길과는 달리 하산길은 몹씨 가파르며
밟으면 용암석이 천길 낭떠러지로 흘러 내리는 자갈길이 였다
청석봉에서 약 1시간40분만에 천지를 뒤에 두고 서파로 하산하여
약 20여km의 길을 8시간만에 주파하여 백두산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이번 산행은 우리 모두에게 아마 평생동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간직될은 물론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자축하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나중에라도 기억하기 위해 백두산에 대해서 몇가지 기록을 남겨 두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선 白頭山이라 부르며 중국에서는 長白山아라 부르는 이곳은
13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6개 봉우리는 북한령이며 장군봉(2,744m)이 최고봉이고
7개 봉우리는 중국령으로 백운봉(2,691m)이 최고봉이다
그리고 천지는 서북쪽이 4.74km 서남쪽이 3.5km의 둘레이고
최고수심이 313m 이며 평균수심은 204m - 라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
[천지의 이미지 사진]
종주를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금강대협곡]에 들러 트래킹을 하며
그 계곡의 웅장함을 보며 감탄을 자아 내기도 했다.
[금강대협곡]
끝으로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점인
중국 대륙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인 단동의 호산산성을 구경했다.
토목한 성의 모양이 북경의 만리장성과 꼭 닮아 있었다
[호산산성]
한편으로는 20m폭의 조그마한 개천에 지나지 않는 중국-북한 국경의 건너편엔
이북의 북한군이 삼발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분단 민족의 아픔을 실감 할 수 있었다.
눈빛이 마추칠수 있는 참으로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조그만 개천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 경계선이며 개천 건너 북한의 마을이 보인다]
호상산성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머나먼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현지 가이드와
아쉬운 이별의 정을 나누며 작별을 고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이번 여행을 이끌어 주신 산누리의 서명수 대장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그동안 서로 말없이 협동하며 도와주고던 우리 대원들,
여행중 나누던 대화에 정이 들어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몇일 자나지도 않았지만
면면히 떠오르는 모습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마지막으로 특히나 고마운 분은 박덕춘 교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크나큰 행운이였다
5박6일 동안 백두산 종주기의 다큐맨타리 영상물 제작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비디오를 찍어주신 그동안의 노고에 깊은 존경심과 마음의 고마움을 전합니다
--참고---
* 천지의 오름길은
1)장백산 셔틀버스에서 내려 장백폭포로 오르는 1시간 코스(북쪽 언덕길-북파)와
2)천문봉으로 오르는 짚차 트래킹-짚차에서 내려 20분(서파)
3)장백산 셔틀버스에서 내려 5호 경계비로 20분 코스(서쪽 언덕길-서파)와
20분 마져도 걷기가 힘든 다면 가마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 백두산 종주코스는(8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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